2009년 04월 23일
문어체와 구어체의 사이
한글은 한국인의 가장 큰 유산이자 세계적으로 위대한 언어다. 과학적이며 체계적이고 소리를 풀어 쓰는데 있어 그 효율성을 자랑한다. 특히 일본어처럼 소리를 표현할 때 제약이 많지 않다. 뭐니뭐니 해도 한글이 자랑스러워 보일 때는 빠떼리, 테레비 같은 저질 일본어의 영어 발음을 보며 비웃을 때가 아닐런지.
...뭐라고? 한글로도 저렇게 쓰이고 있다고? 이래서 세종대왕님께서 1000원, 5000원짜리가 아닌 시퍼런 만 원짜리 지폐 속에 들어가셨을 거야. 왜냐고? 얼굴이 시퍼렇게 질리셨으니까. 껄껄.
그런데 이렇게나 아름다운 우리의 한글이 오히려 재미있는 기사를 쓰는 대에 있어서는 제약적인 요소가 된다. 이게 무슨 남극 세종기지에 화롯불 타는 소리냐! 그 말인 즉슨, 한글은 다른 언어에 비해 변형이 자유롭고 또 문어체와 구어체의 차이가 워낙 극명하기 때문에 한글을 사용해서 기사를 쓸 시에 자연스레 딸려오는 제약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아직까지는 쉽지 이해가 가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차근차근 이 글을 끝까지 읽어보면 아마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짤막한 경고문 하나. “인생은 짧고, 이 글은 길다.”

"인생은 짧고, 이 글은 길다"
지난 글에서 한국과 미국 언론에서의 취재원 특성 차이에 대해 자세히 다룬 바가 있다. 오늘은 취재원과의 인터뷰가 과연 한국과 미국의 기사에 어떻게 기입되는가를 분석해 보려 한다.
먼저 한국 기사의 예를 살펴보자. 지난 글에도 등장한 취업난을 다룬 기사다. 아래는 이 기사에서, 취재원의 인용구가 들어간 한 문단을 발췌한 것이다.
그에게 가장 큰 난관은 서류전형이다. 그는 “기업마다 자기소개서 항목을 이전보다 까다롭게 요구한다”며 “서류전형 통과가 어려운 지방대 출신들은 훨씬 공을 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요즘 취업 준비생들은 입사 지원 서류 작성부터 면접 방법까지 컨설팅도 받는데, 비용이 만만치 않다. 김씨는 “한번 컨설팅을 받으려면 20만원 이상이 든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따옴표가 들어간 인용구, 즉 취재원이 직접 말한 내용을 전달하는 문장인데도 한 차례 거쳐서 간접적으로 전달되는 느낌이 강하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한글 구조의 특성상 ‘며’, ‘고’ 등의 짧은 접속사가 따옴표 사이를 메우고 있다. 이러다 보니 대화체의 맥이 끊겨 버릴 수 밖에 없다. 게다가 ‘며’ 혹은 ‘라며’라는 접속사의 특성상 제3자가 당사자의 대화를 전달하는 느낌을 준다. 즉, 취재원의 입에서 나온 말은 기자의 말을 거쳐 독자에게 전달된다는 느낌이 강렬히 각인되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는 기자를 통해 취재원의 말이 걸러진다는 느낌이 거의 없다. 이번에는 뉴욕타임즈의 한 기사 중 인용구가 담긴 문단을 보자.
Justice Breyer elaborated on what children put in their underwear. “In my experience when I was 8 or 10 or 12 years old, you know, we did take our clothes off once a day,” he said. “We changed for gym, O.K.? And in my experience, too, people did sometimes stick things in my underwear.”
따옴표 안의 문장을 유심히 살펴보자. 벌써 한국과 미국 기사의 느낌이 확 틀리지 않는가. 보시다시피 미국은 취재원의 대화를 토시 그대로 옮기기 때문에 취재원과 직접 대화를 하는 듯한 느낌을 주지, 기자에 의해 한 번 걸러져서 기재되는 분위기는 풍기지 않는다. 영어라서 이해 안 가시는 분들은 걱정하지 말라. 조금 밑으로 내려가다 보면 친절한 한글 예시가 나올테니.

곧 한글로 된 예시가 잔뜩 나옵니다.
전 친절하니까요.
두 번째 한국 언론의 문제는 취재원의 말과 말투를 편의에 따라 수정한다는 점이다. 미국은 따옴표 안의 문장을 취재원이 말하는 ‘그대로’ 받아 써야 한다. 토시 한 자가 틀리는 순간, 그것은 비윤리적인 기사로 변모한다. 예를 들어 기자가 금연에 관한 취재를 위해 어느 금연전문가를 인터뷰 했다고 치자. 그리고 기자는 인터뷰 내용을 녹음기에 담았다. 녹음한 내용 중 일부분이 다음과 같다.
“금연을 할 때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기자의 질문)
“흠… 글쎄요. 일단은 자신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겠지만요, 주변 분들의 도움만큼 큰 도움이 되는 게 없어요. 보통 사람들이 ‘금연 그까짓 꺼 마음만 먹으면 쉽지 뭐!’라고 하잖아요? 에… 근데 그게 막상 해보면 쉽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가족이나 애인에게 당당히 금연의지를 밝히고 도와달라고 하는 게 큰 의지도 되고, 자신을 다잡게…에… 되는거죠. 참 간단하죠?”
녹취 내용이기에 당연히 문어체가 아닌 구어체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대화 내용이 한국 기사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금연전문가 미타민씨는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금연하는데 가장 큰 도움이 된다”며 “가족이나 친구에게 금연의지를 밝히는 것이 자신을 다잡는 데에 큰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십중팔구는 이렇게 쓰이게 된다. 한글의 특성상 구어체와 문어체의 차이가 영어에 비해 크다는 특징이 있지만, 그것을 고려하더라도 저렇게 문어체로 바꿔놓으니 딱딱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게다가 문어체로 변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금연을 할 때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에 대한 취재원의 답변이 자연스레 요약이 되어버렸다.
아래는 위와 같은 내용의 녹취록을 지녔을 경우 만든 미국식 인용이다.
“일단은 자신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겠지만요, 주변 분들의 도움만큼 큰 도움이 되는 게 없어요. 보통 사람들이 ‘금연 그까짓 꺼 마음만 먹으면 쉽지 뭐’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게 막상 해보면 쉽지 않거든요” 금연전문가 미타민씨가 말했다. “가족이나 애인에게 당당히 금연의지를 밝히고 도와달라고 하는 게 큰 의지도 되고, 자신을 다잡게 되는 거죠. 참 간단하죠?”
무엇이 다른지 차이점이 확 드러나지 않는가. 미국은 ‘흠…’ ‘에…’ ‘그러니까…’등 불필요한 추임새를 제외하고는 구어체 그대로를 가져온다. 위에 제시한 뉴욕타임즈 기사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이따금씩 추임새마저 가져오는 경우도 많다. (위의 뉴욕타임즈 기사에서는 you know라는 추임새마저 그대로 쓰였다) 심지어 취재원이 욕설을 내뱉었다면 그조차 그대로 인용한다. 물론 F**K처럼 살짝 표현을 순화시키는 경우도 있지만 취재원이 한 말을 그대로 가져온다는 점은 미국 언론의 매우 중요시되는 사항이다. 그렇기에 미국의 기사는 딱딱하지 않고 생생하며 현장감 있는 기사가 되는 것이다.
미국의 언론은, 취재원이 내뱉은 말을 ‘그대로’ 가져와야 하기 때문에 당연히 대화 내용을 요약해서 따옴표 처리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요약을 할 경우에는 따옴표를 떼고 'ㅇㅇsaid that '같은 형식의 간접 인용을 해야 한다.
우리나라 언론은 여기서 더 나아가 심지어는 질문, 답변 형식의 직접 인터뷰를 기재한 글에서 조차 구어체를 문어체로 바꾸어 인용한다. 예를 들면,
기자: 검찰에 소환되셨을 당시 소감이 어떠셨는지요?
이완용 의원: 무엇보다도 가족에게 너무 미안했다. 나 혼자 짊어져야 했을 짐이다. 정말 죽고 싶을 정도로 후회했다.
이런 식의 질답 인터뷰를 많이 봐왔을 것이다. 위에 등장한 이완용 의원이 실제 인터뷰에서 ‘미안했다’ ‘후회했다’식의 평어체를 쓰지 않았다는 것은 자명하다.
이 인터뷰도 미국식으로 기재한다면,
기자: 검찰에 소환되셨을 당시 소감이 어떠셨는지요?
이완용 의원: 일단 가족에게 너무 미안했습니다. 저 혼자 짊어져야 했을 짐인데… 에휴… 정말 죽고 싶을 정도로 후회가 됩니다.
지금까지 알아본 인용구의 차이점은 내가 미국에서 기사를 쓰기 시작했을 당시 엄청난 혼동으로 다가왔다. 헌데 시간이 지나 미국의 기사를 매일 접하고 또 미국식 인용구에 익숙해지고 나니, 세상에 맙소사! 기사가 ‘재미있는’ 것이다. 딱딱하지가 않고 소설을 읽는 느낌마저 준다. 이런 혼란의 시기를 겪고 나니 ‘한국 기사는 취재원과의 대화를 왜 이렇게 딱딱하게 인용하는 걸까’ 라는 고민이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고민은 ‘언론은 독자들의 관심이 있어야 지탱될 수 있는 건데 굳이 기사를 딱딱하게 써서 독자들의 흥미를 없애야만 하는 걸까’ 라는 숙고로 변형 되기에 이르렀다.

‘한글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문제일까’ 라는 생각에 직접 미국식 인용구 형식을 사용해 한글로 글을 써보았다. 그 글이 바로 이 블로그에 썼던 '폴 포츠, 전 세계를 울린 37세 핸드폰 판매원의 목소리'라는 글이다. 링크를 따라가보면 알겠지만, 미국식 인용구만을 사용했다. 물론 기사의 정석적인 형식은 취하고 있지 않다. 어디까지나 '인용구를 미국식으로 쓰면 더 생생하고 더 재미있을까?' 하는 가설을 테스트해보기 위한 시험적인 방식의 글을 써 본 것이기에, 기사의 정형보다는 단지 인용구를 미국식으로 쓰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그런데 막상 써보니 혹시나가 역시나. "~~며 ~~고 말했다"식의 한국식 인용구 보다야 더 현장감 있고 생생하지 않는가.
오늘도 글의 길이가 점점 자비심이 없어지는 관계로 이쯤에서 이만 줄여야겠다. 오늘은 한미 언론의 인터뷰 내용의 기재 방식의 차이점에 대해 알아보았다. 요약하자면, 한국 기사는 핵심을 유지한다는 전제하에 인터뷰 문장들을 자유자재로 변형시킬 수가 있는 반면, 미국의 기사는 인터뷰상의 대화를 토시 그대로 옮겨야 한다. 더욱이 문어체와 구어체가 현저히 다른 한글의 특성상, 구어체를 문어체로 옮기는 과정에서 간결하지만 딱딱한 기사가 탄생될 수 밖에 없다.
가독성이 생명인 신문인만큼 지루함 혹은 딱딱함은 공공의 적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현재 한국의 기사 스타일은 취재원의 인터뷰 내용 조차 지루함을 유발하기 쉬운 문어체로 변형해 기재하고 있다. 그렇다고 좀 더 생생하고 재미있는 표현이 가득한 미국식 기사 스타일을 도입하자고 주장할 수도 없는 노릇. 벌써 3편에 걸쳐 지겹도록 쓰는 표현이지만 우리나라 언론의 구조적, 환경적 문제를 고려해보면, "기자님들! 우리 모두 기사 스타일을 바꿔봅시다!"라 외치는 행위는 그저 뜬구름 잡는 낭만주의자의 헛소리에 머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p.s: 벌써 연재가 3편에 도달했는데 아직까지도 한미 저널리즘의 차이점에 대해 쓸 소재가 너무나 많이 남아있습니다. 아마 연재를 다 끝낼 때 쯤 되면 책 두 권 분량은 나오지 않을까 싶네요. 다음 회에는 많은 분들이 댓글로 요청해주신 한국과 미국의 '기사 제목'에 대해 비교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에도 이 긴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거듭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댓글, 링크 추가, 추천 모두 환영입니다. :D
# by | 2009/04/23 16:05 | 본격 한국 언론 탐구 | 트랙백(1) | 덧글(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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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기사가 단순한 정보 전달 외에도 읽기에 '재미가 있어야' 구독자 수가 늘어날 거라고 믿고 있거든요.
그런데 웃긴건 실제 취재원의 이야기와 기자가 요약하고 괄호치기 한 문장의 길이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거죠... 뭐하러 요약은 하는지...
이젠 사람들이 언론을 향한 불신이 워낙 커져서 기사에 뭐를 해도 소설로 보이니 이거 참 문제입니다...
제 생각을 feedback해드리려다 댓글이 너무 길어져서 트랙백 걸겠습니다. 다른 분들께 민폐... OTL
오타 수정했구요. 트랙백 해주신 거 얼른 가서 읽고 댓글 달겠습니다 ^^
폴 포츠 글도 읽어주셨다니 감사해요! ㅎㅎ
문어체 또한 몇 십 년 후에는 지금과 다른 형식으로 진화할지도 모르겠군요...
예를 들자면 시도 때도 없이 한자로 도배 해 놓은 책들 이라던지. 법조문이 보통 그렇죠.
요즘은 혼동 할 만한 단어만 괄호치고 표기하긴 하지만...
일단 문체 바뀌면 어르신들께서 반발 할 껍니다.
시간이 지나면 수그러들긴 하긴해도.